연성/글

[드리밍/신미케신] 당신은 무엇을 보며 눈을 감았는가.

세이랸 2020. 7. 27. 01:31

※메인스토리 2부, 3부 1장,너와 창가의 노스텔지어 이벤트 스토리 스포일러 주의

 

 

*

 피어오르는 연기.

 타오르는 불길.

 허물어져 가는 벽.

 당신은 무엇을 보며 눈을 감았는가.


  몇십 분 전까지 세련된 외관과 먼지 한 톨 없는 복도를 자랑하던 명문 고등학교는, 지금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폐허가 되었다. 벽은 한입 베어 문 랑그드샤처럼 바스러지고 깨진 창문의 파편은 언젠 가의 비눗방울처럼 온갖 색으로 반짝인다. 이따금 들려오던 비명은 이미 멎은 지 오래고, 지금 유일하게 나의 곁을 지키는 그. 시바사키 신야는 굳게 닫힌 눈을 뜰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색색 들려오는 숨소리와 박동하는 손목이 그의 생명을 전해주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느낄 수 있을까.

 원인을 찾기에는 끝이 없고 자책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일렁이는 시야와 주저앉은 다리로 느껴지는 균열, 열기, 절망감. 84년 후에야 찾아올 터인 죽음은 지금 눈앞에 찾아와 나를 비웃고 있었다.

 

 인간의 생명은 쓸데없이 길다고만 생각했다. 좋아하던 옷, 구두, 그리고 소중한 친구마저 떠나보낸 후에도 계속해서 살아가야만 하는 인생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간절하게 죽고 싶은 적은 없었지만, 간절하게 살고 싶은 적도 없었다.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는, 그런 주제에 시계의 바늘을 빼앗고 멀어져가는 봄을 붙잡고 싶어하는 모순적인 삶이었다. 말로 한 적은 없었지만 내일 당장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평소처럼 유명한 케이크 가게에서 쇼트케이크를 먹고 마음에 드는 색의 매니큐어를 바른 후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죽음은 나의 생각보다 교활하게, 행복에 취해 해이해진 사람부터 좀먹어갔다.

 그가 없는 삶. 더 살아갈 만한 마땅한 이유가 있을까? 아니, 애초에 이 폐허에서 살아남을 수는 있을까. 나의 사랑은 그다지 당신이 없으면 못산다든가, 헤어지면 죽을지도 모른다든가 하는 비정상적으로 일그러진 의존증인 건 아니었다. 어느 날 사라진다 해도 그저 의미 없이 흘러가는 인생에 스쳐 지나간 봄바람을 다시 맞을 수 없게 되는 것. 다시 이전처럼 손 틈 사이로 모래알만이 흘러내리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뿐일 텐데도 해이해져 버린 나는 또다시 삶의 이유를 찾으려 들것을 알기에. 나는 지금 이 순간마저도 자신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네일이 벗겨진 손으로 당신의 팔을 붙잡고 상처 입어 엉망이 된 다리를 움직여 나아간다. 가발은 엉키고 찢겨 엉망이 되었고, 우아하고 고상한 걸음걸이가 아닌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한발을 내디딘다. 흐려진 시야보다도 손끝 발끝의 촉감에 의존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모르는 길을 걸어나간다. 두 사람분의 체중에 다리가 풀리고 아끼는 머리 방울이 찢기고 망가져도 나아간다. 지금의 나는 귀엽지 않아. 아름답지 않아. 하지만 그런 나에게조차 당신은 웃어준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나는 그저 당신이 필요할 뿐.

 

 죽게 두지 않아.

 

 

 

*

 "여기도......"

 

 그럼에도 신은 무정하게, 또다시 굳게 닫힌 방화 셔터를 올려다보다 곧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이를 악문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되는 걸까.

 흘러가는 시간을 부정하려 한 벌이라면 그것은 내가 받아야만 하는 벌이고, 100년의 생명을 소홀히 한 벌이라면 그것 또한 내가 받아야만 하는 벌이다. 16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평생을 남을 위해 희생하며 산 이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다는 것인가.

 

 '시온 씨, 아까부터 비눗방울 나올 때 즐거워 보였으니까, 잔뜩 나오면 기뻐할 것 같아서 열심히 했어'

 "........"

 

 주마등처럼 피어오르는 추억이 아프다.

 그와의 추억은 솟아오르는 불길보다도 빠르게 나를 잠식해간다. 비록 그 일이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건의 발단이라고 해도, 그 순간의 추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뜨겁게 달궈진 지면에 털썩 주저앉아, 용량이 초과되어 역으로 냉정해져 버린 머리로 생각한다.

 

 '귀여워! 시온 씨에게 잘 어울려'

 "......신야 군,"

 

 언젠가 또 같이 디저트 카페에 가자.

 

타오르는 불길은 가라앉지 않았고, 텁텁한 공기는 맑아지지 않았지만. 그와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조금 숨통이 트인듯한 착각이 들었다.